진료실에서 환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여성의 몸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목소리를 낮추게 되는 주제라는 걸 자주 느낍니다. 생리, 폐경, 질 건조, 성건강 같은 단어 앞에서 말을 고르고, 망설이다 진료 막바지에야 "사실은…" 하고 운을 떼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널리스트 마리나 게르너가 쓴 『The Vagina Business』를 처음 읽었을 때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 글은 특정 질환을 다루는 의학 정보가 아니라, 한 권의 책을 빌려 "왜 여성의 건강은 오래도록 뒷전이었나"를 함께 생각해 보려는 소개 글입니다.
한 권의 책이 던지는 질문
『The Vagina Business』의 부제는 "여성 건강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 돌파구들"입니다. 저자 마리나 게르너는 경제·기술 분야를 오래 취재해 온 기자입니다. 그녀가 이 주제에 발을 들인 계기는 한 스타트업 취재였다고 합니다. 여성의 심장 신호를 감지하는 웨어러블 기술을 접했는데, 정작 투자자도 언론도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을 보며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 의문은 책 한 권으로 이어졌습니다. 게르너는 15개국 100여 명의 창업가, 연구자, 투자자를 인터뷰해 생리, 피임, 임신과 출산, 폐경, 성건강에 이르는 여성 생애 전반의 기술을 추적합니다. 책의 핵심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여성의 몸은 의학과 산업 양쪽에서 오래도록 "기본값"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구도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인상적인 이유는 분노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여줍니다.
진료실에서 보면, 환자분들이 자신의 증상을 "예민한 탓"이라 자책하시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 자책의 뿌리에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사회적 외면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차분히 짚어 줍니다.
여성의 몸은 왜 연구에서 빠졌을까
여성 건강 연구의 공백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임상 현장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사례가 자궁내막증입니다. 자궁내막증은 가임기 여성의 약 열 명 중 한 명에게 영향을 준다고 알려져 있지만, 증상이 시작된 뒤 진단까지 평균적으로 여러 해가 걸린다는 점이 꾸준히 보고됩니다. 여러 나라의 연구를 모은 검토에서도 진단 지연은 평균 수년에 달했습니다.
왜 이렇게 늦어질까요. 생리통이 "원래 그런 것"으로 여겨지거나, 통증이 "스트레스 때문"으로 설명되며 정밀한 평가의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게르너는 이런 지연이 개인의 인내심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통증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아 온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임상시험에서 여성이 충분히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합니다. 호르몬 주기가 "변수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여성 참여가 제한되던 시기가 길었고, 그 결과 약물 반응이나 질환 양상에서 성별 차이가 충분히 규명되지 못한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생리불순이나 호르몬 변화가 단순한 불편을 넘어선 신호일 수 있다는 점은 여성 건강의 바로미터로서의 월경을 다룬 글에서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
펨테크, 1조 달러로 추정되는 시장
게르너가 책에서 가장 힘주어 말하는 개념이 "펨테크(FemTech)"입니다. 여성의 건강을 다루는 기술 산업을 뜻하는 말로, 월경 추적 앱부터 불임 진단, 골반저 건강 기기, 폐경 관리 솔루션까지 폭이 넓습니다.
시장 규모에 대한 추정은 기관마다 다르지만, 게르너는 펨테크의 잠재 시장 규모가 약 1조 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투자 흐름과의 간극입니다. 여러 분석에서 여성 단독 창업팀이 받는 벤처 투자 비중은 한 자릿수 초반에 머무는 것으로 보고됩니다. 시장의 잠재력과 실제 자금 배분 사이의 거리가 그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게르너가 던지는 반론은 명쾌합니다. 여성 건강은 "틈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국 등에서 여성이 가정의 의료 관련 의사결정 상당 부분을 담당한다는 조사 결과는 여러 차례 인용되어 왔습니다. 책은 이를 근거로, 여성 건강에 대한 투자는 자선이 아니라 명백한 경제적 기회라고 정리합니다. 다음 표는 책이 짚는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정리한 것입니다.
| 측면 | 책이 전하는 관점 |
|---|---|
| 시장 잠재력 | 펨테크 잠재 시장이 약 1조 달러로 추정됨 |
| 자금 배분 | 여성 창업팀이 받는 벤처 투자 비중은 여전히 낮은 수준으로 보고됨 |
| 소비 주체 | 가정 내 의료 의사결정에서 여성의 비중이 크다고 조사됨 |
| 연구 공백 | 여성 특이 질환에 배정되는 연구·개발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지적 |
혁신이 도달하지 못하는 또 다른 벽, 검열
게르너가 짚는 또 하나의 장벽은 "이야기되지 못함"입니다. 좋은 기술과 제품이 나와도, 그것을 알릴 통로가 막히는 일이 잦다는 것입니다. 책은 일부 플랫폼과 매체가 생리, 폐경, 질 건강, 성건강 관련 콘텐츠를 "민감하다"는 이유로 제한하면서, 정작 남성 건강을 다루는 광고는 비교적 자유롭게 노출되는 비대칭을 지적합니다.
이 비대칭은 정보 격차로 이어집니다.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정확한 정보가 닿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죠. 임상에서도 비슷한 결을 느낍니다.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사실인데, 부끄러움 때문에 묻지 못하고 증상을 키워 오시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정보가 자유롭게 오갈수록 진단과 치료의 시기도 앞당겨집니다.
여성 건강이 궁금하다면 편하게 물어보기책이 제안하는 변화의 출발점
『The Vagina Business』는 비판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일상에서 시작할 수 있는 변화의 방향을 제안합니다.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태도와 대화에서 출발하는 변화입니다.
- 배우기: 여성의 호르몬 주기와 생체 리듬을 이해하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의 몸을 아는 것이 모든 건강 관리의 출발점입니다.
- 이야기하기: 질, 생리, 폐경을 부끄러운 단어가 아니라 일상의 단어로 말할 때 인식이 바뀝니다.
- 투자로 바라보기: 여성 건강을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정당한 산업으로 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 함께하기: 여성 건강은 여성만의 일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점을 책은 강조합니다.
- 낙인 깨기: 불편한 대화가 결국 변화를 만든다는 것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입니다.
이 중에서 의사로서 가장 공감하는 대목은 "이야기하기"입니다. 진료실에서 환자분이 자신의 증상을 정확한 단어로 말할 수 있을 때, 진단은 훨씬 빨라집니다. 부끄러움을 덜어 드리는 것도 진료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진료실에서 다시 읽는 이 책
게르너는 비교적 개방적이라 여겨지는 사회에서도 "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쉽지 않다고 적습니다. 한국의 진료실에서 보면, 그 어려움은 한층 더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정기 검진을 미루다 증상이 깊어진 뒤에야 찾아오시는 경우가 그 단면입니다. 이런 망설임이 검진을 늦추는 이유에 대해서는 정기검진이 왜 중요한지를 따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질"과 "폐경"을 부끄럽게 말하지 않을 때 비로소 연구가 시작되고, 기술이 발전하며, 여성의 몸이 마땅한 관심을 받습니다. 책이 말하는 변화의 출발점도 결국 "말할 수 있는 분위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단순한 산업 보고서가 아니라, 진료실 밖의 응원으로 읽었습니다. 폐경기 변화처럼 흔하지만 잘 이야기되지 않는 주제 역시 갱년기 신체 변화의 원인과 기전을 함께 알아 두시면, 자신의 몸을 더 편하게 바라보실 수 있습니다. 작은 호기심이 검진과 상담으로 이어지고, 그 한 걸음이 건강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혹시 책을 읽다 떠오른 질문이나 평소 망설였던 여성 건강 고민이 있으시다면, 채팅으로 부담 없이 문의해 보세요. 저희 우아한여성의원은 과잉 진료 없이 꼭 필요한 검사만 정직하게 안내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글쓴이: 이동희 대표원장 · 산부인과 전문의 · 의료진 소개 보기
최초 발행 2025년 10월 25일 · 마지막 검토 2026년 5월 30일
참고 자료: Marina Gerner, The Vagina Business (2024), McKinsey Health Institute 여성 건강 보고서 (2024), Endometriosis diagnostic delay scoping review (2024)
본 글은 일반적인 건강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개별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증상이 있다면 진료를 통해 상담하시기 바랍니다.